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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기에 생각하는 복음의 토착화 문제
추수감사절기에 생각하는 복음의 토착화 문제
  • 익투스타임즈
  • 승인 2020.11.1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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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기 11월 셋째 주에 지키는 나라, 미국과 한국밖에 없을 것
한국 감리교회, 감리교 4대 신학원리에 5번째 원리인 ‘토착문화’ 원리 적용 필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이정순 교수가 추수감사절기를 맞아 보내 온 글 전문입니다.(편집자 주)

한국 교회는 해마다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 주일로 지킨다. 한 해 동안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은혜에 감사하는 특별한 절기인 것이다. 사실 11월 셋째 주일은 우리나라의 농경 주기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추수는 10월말이면 대부분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11월 셋째 주는 늦가을과 초겨울이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해서 추수감사절을 성대하게 치르는 데는 다소 늦은 시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10월이 계절적으로 추수의 시점에 더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농경사회와 거리가 먼 도시 교회에서는 10월이든 11월이든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 주일이 다가온다. 한 해 동안 지은 농사로 얻은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는 절기는 신앙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올 해는 코로나라 바이러스라는 전 세계적인 재난과 유례없는 폭우와 태풍을 딛고 얻은 결실이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농사와는 관계없는 삶을 산다 하더라도 지난 1년간의 삶을 뒤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특별한 절기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주일은 영국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에 도착한 후 한 해를 보내고 얻은 수확에 감사하여 드린 감사예배에서 기인한다고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매해 추수감사 주일 때 설교에 항상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누구에서 기인했건 추수감사 주일이 한국교회에 중요한 절기로 자리 잡은 것은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로까지 생각된다.

하지만 추수감사 주일의 형식적인 측면은 보다 한국 문화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럴 때 이 땅에서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의 본래 의미가 더 잘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추수감사절이 유래된 미국에서는 청교도들이 낯선 미국 땅에 도착해서 한 해를 잘 지내고 첫 예배를 드렸다는 11월 셋째 주(또는 넷째 주) 목요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추수감사 목요일이 들어 있는 주에는 수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연휴로 지킨다. 추수감사 날 당일(목요일)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족이 사는 곳을 찾아 가서 이른바 추수감사 목요일 저녁 만찬을 가족과 같이 나눈다. 사실 오늘날 미국에서 추수감사 절기는 우리의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가깝다. 사람들이 교회 중심 보다는 가족 중심으로 모이는 큰 명절인 것이다. 때문에 미국에서 추수감사 절기는 교회 절기보다는 모든 국민이 기독교 신앙에 관계없이 가족을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고 감사하는 큰 명절이다. 최근에는 추수감사 휴일인 목요일 다음에 금요일에 열리는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세금 없는 날, 상품 세일 대잔치의 날)라는 소비주의와 겹쳐서 감사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사람들은 온통 먹고 즐기고 쇼핑하는 것으로 이 절기를 지내곤 한다. 추수감사절기의 본원지지 미국의 추수감사절 분위기는 우리의 추수감사절과는 사뭇 다르기만 하다. 또 추수감사 절기가 끝나면 바로 크리스마스 절기로 넘어가게 되고, 교회는 대림절을 시작한다. 거리마다 온통 크리스마스라는 또 하나의 휴일을 초점으로 대 쇼핑시즌이 시작된다.

해마다 추수감사 주일이 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의 토착화문제이다. 왜 우리는 미국 기독교에 의해 유래된 추수감사 주일을 아직도 미국 기독교처럼 11월 셋째 주에 지키는가? 추수감사절은 미국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일종의 미국에 토착화된 전통인데 왜 우리는 그것을 창조적으로 수용 발전시키지 못하는가? 가령 우리의 고유 명절인 추석과 연계하여 지키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복음적으로 수용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드리지 못하는가? 추수감사절은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시작한 미국 기독교의 전통인데 어째서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가? 청교도의 고향인 영국에는 정작 이런 전통이 없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추수감사절기를 11월 셋째 주에 지키는 나라는 아마 미국과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개신교회에만 해당되지만 말이다.

이 땅에서 가톨릭교회까지 포함하면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지 24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라는 씨앗은 얼마만큼 뿌리를 깊이 내리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물음을 던져 본다. 정말 한국적 기독교라는 실체는 있기는 한 걸까? 아니면 아직도 우리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영향 안에 존재하는 일부분에 불과한가? 추수감사절 하나만 보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복음의 토착화는 아직도 실현되지 못한 듯하다. 또 현재 교파를 불문하고 신학교육에서 사용하고 교과서 대부분이 서구 신학자의 저작들을 번역한 것들임을 볼 때 한국의 신학 역시 서구 신학의 영향을 벗어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추수감사절에 생각하는 복음의 토착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토착화(土着化)란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는 어떤 제도나 풍습, 사상 따위가 그 지방의 성질에 맞게 동화되어 뿌리를 내리게 됨이다(네이버국어사전). 신학적으로 토착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특정 문화 속으로 육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토착화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사건(1:14)에 근거를 둔다. 즉 하나님 자신이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세계 곳곳의 구체적인 역사, 문화, 전통 안에 육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처음에 팔레스타인 문화에 육화되었고, 이후 서구 문화에 육화되어 서구 기독교라는 독특한 형태의 기독교를 발전시켰고, 이제 한국 땅에 복음이 전파되어 한국이라는 문화와 전통에 철저히 육화되고 마침내 한국 기독교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지만,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땅에 전래된 복음의 본질과 그것을 담고 있는 서구 기독교의 문화와 전통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복음의 본질은 불변하며 보편적이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서구 기독교의 형식과 틀은 상대적인 방편에 불과하다는 점을 여전히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감리교 4대 신학원리에 5번째 원리인 토착문화라는 원리를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1930년 한국감리교회가 자치를 선언하면서 복음의 토착화를 중요한 원칙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국 감리교인라면 복음의 토착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1960년대부터 감리교 신학자들은 복음의 토착화 문제를 고민했다. 9대 목원대 학장(1984-1985)을 지낸 김하태 박사 역시 서구 기독교를 한국에 토착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감리교 신학자였다. 미국에서 귀국해 목원대 신학과에서 교수로 가르쳤던 김하태 박사는 한국 전통 중 특히 유교 전통을 연구하여 한국 기독교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오랫동안 서구신학과 철학에 젖어 있던 김하태 박사는 뒤늦게 한국 전통 사상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곤 했다. 그는 미국에서 서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감리교 목사로 오랫동안 목회하였고, 또 미국 대학에서도 철학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했다. 그런 그가 한국인으로서 복음의 토착화를 주장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 신학의 정립에 뒤늦게나마 노력을 기울였던 김하태 박사는 한국기독교가 먼저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에 의해 우리 문화를 멸시해온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복음의 토착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19세기에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개신교 선교정책이 서양의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와 서 인종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서양인과 서양의 것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해졌는데,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포교한 결과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의 고유한 문화전통과 종교와 철학은 열등한 것이라고 묵살시켜 버렸는데 이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실로 한국인으로서 기독교를 수용할 때 한국의 전통과 사상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일 뿐 아니라, 올바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바탕이 텅 텅 빈 마음에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김하태, 마음 머물 곳을 찾아 서, 177).

그러므로 김하태 박사는 이제 한국신학자라면 당연히 한국문화의 정수를 예민하게 파악하고 또 이해함으로써 한국적 토양에 맞는 신학의 수립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한국신학정립의 필요성이 대두되는데, 그는 먼저 기독교를 한국적 토양에 토착화하는 데서 한국신학에 관한 논의를 출발시킨다. 바로 토착화 작업이야말로 한국신학을 형성하는 첫 번째 과제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가 한국 땅에 들어와 한국 종교와의 대화와 수정의 과정을 지날 때 기독교는 사상적, 논리적 또는 건설적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므로 토착화 신학의 문제가 대두된다. 토착화 신학의 목적은 기독 교의 진수를 어떻게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느냐 하는 데 있다. 한국적 언어와 한국적 정서와 한국적 사 상을 매개로 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한국인에게 알맞고, 한국인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놓 을 때, 이 작업은 완성될 것이다”(김하태, 동서철학의 만남, 212).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복음의 토착화라는 과제를 생각해 본다.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의 형식까지 절대불변의 진리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한국 고유의 문화에 뿌리내리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미국은 미국 기독교이고 한국은 한국 기독교이다. 복음의 본질은 불변하지만, 그것이 육화되어 나타나는 형태는 다양하다. 이 세계 곳곳에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 전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이제 곳곳에 복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 맺는 모습을 기뻐하실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보수적인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면서 여전히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전통 문화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이미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복음의 진리를 고백하고, 또 성서의 야훼, 엘로힘, 테오스를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그분을 예배하고 있다. 이미 토착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추석이나 설날에 거의 전 가정에서 지키고 있는 조상 제사 전통도 이미 추도예배라는 토착화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이 외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어쩌면 토착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한국인의 실존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예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땅에 복음이 온전히 토착화되어, 한국 기독교라는 뿌리 깊은 나무에서 열린 풍성한 열매들을 당당하게 전 세계에 보여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육화했듯이, 그분의 복음 진리 역시 이 땅에 온전히 육화되어 토착화가 온전히 실현될 날을 고대해 본다.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이정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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