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06-20 15:37 (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이정순 교수
  • 승인 2021.03.09 06: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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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신학과 영성

코로나19 바이러스 시대가 시작된 지 벌써 1년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인 백신접종이 시작됨으로써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종식을 기대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바라보고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그동안 마스크 안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우리의 일상이 조금씩 회복될 수 있을 것 같다. 더 이상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과 죽음이 없는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꿈꿔 본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기다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말하고 있다. 신학과 영성에서도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온라인 비대면 만남의 증가로 인해 신앙공동체의 형태도 과학기술을 매개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형식적이고 기술적인 측면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영어 단어는 그리스어‘paradeigma’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로써,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생각의 특이나 사물을 보는 방식을 의미한다. 토마스 쿤의 말에 의하면,“패러다임은 사물을 보는 방식, 문제의 인식과 해법에 관한 특정 시대의 과학자 집단의 공통된 이해를 말한다.”토마스 쿤은 과학의 발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토마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 뉴턴의 패러다임, 아인슈타인의 패러다임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그에 따르면, 과학의 역사는 개별적인 발견과 발명이 축적되어 발전되거나 차근차근 오류를 수정해나가면서 발전된 게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판을 완전히 뒤엎는 혁명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보통 여러 이론들이 공존하는 단계에서 한 이론이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정상과학의 단계로 전개된다. 그런데 정상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징후와 현상들이 등장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새로운 정상과학이 다시 정립된다는 것이다. 물론 정상과학은 이상 징후들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유지하기 위한 과학 진영의 보수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상과학’은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 내에서 수행되는 과학 활동을 의미한다. 정상과학은 기존 패러다임이 인정하는 규칙을 바탕으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풀어간다. 또한 기존의 과학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한 시기에는 그것을 정상과학이라는 진리체계로 여긴다. 이때 정상과학을 이루는 공통의 규칙과 사고의 틀이 패러다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볼 때 정상과학은 과학집단의 권위와 과학자 개인의 주관적 신념이 많은 역할을 한다. 문제는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더 이상 과학의 문제를 수정, 보완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가령 천동설로는 지구의 공전현상과 자전현상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었다. 즉 지구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태양 중심의 패러다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다. 이것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본격적인 근대 과학의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볼 때 정상과학은 영원불변하지 않다. 시대마다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의해 정상과학이 규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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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전환은 마치 종교의 회심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급격하고 혁명적이라는 말이다. 과학의 발전은 그저 직선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혁명의 역사라는 말이다. 이제 패러다임 전환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한국 그리스도교의 현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숨겨왔던 온갖 치부가 만천하에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는 때이다. 더 이상 정상이 정상으로 인정될 수 없는 새로운 혁명적인 현실이 도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되는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요구되는 신학과 영성의 방향은 무엇인가?

첫째, 자기 성찰(self-reflection)의 신학과 영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는 자기 성찰 없이 기복신앙을 추구하고 외형적인 성장에만 매달려 왔다. 이제 잠시 멈추고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성찰 없는 신앙은 맹목적 신앙인을 만들어낼 뿐이다. 아무리 신앙이 뜨거워도 자기 성찰 없는 신앙은 미신일 뿐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이미 많은 예들이 사실로 드러났다. 과학의 시대 온갖 과학의 혜택을 받고 살면서도 스스로 과학의 진단을 거부하고 나 홀로 신앙의 기적으로만 살겠다고 주장하며 방역 원칙을 거부한 교회들과 신앙 관련 단체 및 비인가 교육시설에서 바이러스가 쏟아져 나오지 않았는가? 바이러스 백신이 666을 통한 세계 지배라는 뜬금없는 주장으로 바이러스 백신 음모론을 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공공의 안전을 위해 잠시 종교의 자유, 예배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종교 박해로 주장하는 자들도 등장했다. 이 모든 예들이 자기 성찰이 부족한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신앙의 의미는 무엇인지, 하나님을 왜 믿는지, 사회와 공동체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 땅에 사는 동료 인간과 피조물의 의미는 무엇인지 성찰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다. 이제 철저히 성찰할 때이다. 회개도 성찰이 먼저이다. 진정한 회개는 성찰을 통한 사고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그럴 때 진정한 삶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의 구호는“나는 성찰한다. 고로 나는 신앙한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비움과 낮아짐의 신학과 영성으로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 그동안 그리스도교는 채움과 올라감의 신앙을 강조해 왔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도 복을 받기 위해, 더 채우기 위해, 더 많은 권세와 명예를 위해, 더 많은 부와 재물을 쌓기 위해서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부귀영화와 무병장수가 신앙의 유일한 목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식의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은 예수가 가르쳐 준 무소유의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예수의 희생과 십자가 고난의 삶이 빠진 잘못된 신앙인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현실 속에서의 복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현실 종교인 무교(무속)와 비슷하다. 그리스도교가 이런 식이라면 굳이 믿을 이유가 있을까? 예수님이 무당이라면 굳이 그를 주님으로 고백할 필요가 있을까? 굳이 시간을 내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돈까지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무릇 모든 종교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어떤 종교학자는 지적한다. 백번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의 가장 초보적인 차원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면 굳이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굳이 복잡한 신학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필요할 때마다 한 번씩 무당을 찾아 점을 보거나 굿을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예수가 몸소 보여주신 삶의 모습은 일신의 복과 무병장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철저히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통해 모든 이들이 인간답게 사는 하나님 나라야말로 그가 보여준 삶의 비전이었다. 그는 철저히 비움과 낮아짐을 실천하신 분이셨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그리스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한다.“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2:6-11). 초대 빌립보 공동체가 깨닫고 고백했던 예수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제 비움과 겸손과 희생을 몸소 실천하신 예수를 본받을 때다. 더 이상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상 예수와 무관한 그리스도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아니 예수 이름을 팔아 더 이상 장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교회는 종교 비즈니스가 아니다.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요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전위대이다. 교회가 이런 본질을 상실하고 사교집단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더 이상 신앙공동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이 시대 스스로 신앙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어떤 사람들, 특히 큰 교회를 부와 권력처럼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특징은 거만함과 자기의(自己義)이다. 이들은 마치 자신이 예수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를 의인처럼 행세하면서 자신의 말을 진리로 선포한다. 그러면서 자기 말에 위배되면 즉시 이단, 삼단으로 정죄해 버린다. 예수 시대 바리새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무어라 말씀하실까? 예수님은 가장 겸손하게 삶을 사셨다. 평생 거처할 집 한 칸 없이 무소유로 떠도는 예언자로 삶을 사셨다. 그에게는 종교권력이나 세상의 권력을 쥘 기회도 있었지만 모두 거부하셨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그가 몸소 보여주신 비움과 낮아짐의 절정이다. 한국 교회는 과연 이런 예수의 삶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셋째, 사회적 약자를 지향하는 신학과 영성으로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 예수 주위에는 늘 가난한 무리들, 사회적 약자들이 따라 다녔다. 그만큼 이들에게 예수는 구세주요 그의 말씀은 복음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눅6:20)라고 선언하시면서 이들의 자존감을 세워주셨다. 또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이들에게 새 시대의 희망을 안겨 주셨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런 예수의 모습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새 시대의 희망은 커녕 청산되어야할 적폐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무릇 모든 종교의 본질은 사랑과 자비인데, 그리스도교는 이런 본질을 잘 구현해 나가고 있는가? 예수는 대다수 민중들을 억누르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과감히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종교를 회복시키고 실천하셨다.“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6:36)고 예수는 선포하셨다. 더 이상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여전히 종교의 형식과 규율에 얽매여서 정작 본질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또 다시 율법주의로의 회귀에 불과할 뿐이다. 어째서 이런 형식과 규율이 본질이 되고 말았는가? 예수를 따르는 초기 신앙공동체에는 지금과 같은 조직과 형식은 전무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발전하면서 형식과 규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이다. 언제든지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는 것들이다. 생동성(dynamics)을 잃은 형식(form), 본질을 상실한 형식은 언제든 깨져버릴 껍질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 기득권자들로 이루어진 폐쇄 집단이라는 비판이 봇물 일듯이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비판에 귀를 닫고 여전히 자기 멋대로 비상식적으로 사회를 판단하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그들만의 종교’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사회 밖에서 개독교라고 비난해도 무시하고 사탄의 비난쯤으로 정죄해버리면 그만이다. 과학 시대에 최첨단 스마트폰을 쓰면서도 철저히 과학을 인본주의적인 것으로 비난해 버린다. 이 모두가 예수가 비판한 자기의와 교만으로 가득 찬 모습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철저히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라는 울타리, 신앙인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야 한다.‘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이웃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고, 더 나아가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 곧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마음에 새길 때이다. 그리스도교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의 종교이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야말로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받아들이는 종교이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11:28)고 예수는 선포하셨다. 이런 고귀한 초대에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 율법주의자라는 엘리트 의식을 예수는 철저히 거부하고 무너뜨리셨다. 오히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임을 받을 것이고 꼴지가 첫째가 될 것이라고 혁명적인 복음을 선포하셨다.‘뒤 엎는 복음’(upside-down gospel)을 선포하신 것이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뒤엎으신 것이다. 바로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예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이신 하나님을 가로 막을 수 없다. 한국교회가 바로 이런 본질을 회복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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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회복을 위해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일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떤 초대교회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성서를 읽어보면 다양한 초대 교회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교를 확장하고 발전시킨 바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근거가 아니다. 또 그는 역사의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운동을 함께 벌였던 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의 핍박자에서 회심을 통해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만, 그 역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또 한 명의 제자일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루터로, 칼빈으로, 웨슬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자인 그들이 그리스도교 회복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지만, 모두 옳지는 않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예수, 맨사람 예수를 토대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근거인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그리스도교는 바울교, 루터교, 칼빈교, 웨슬리교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특히 오늘날 자칭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극우적이고 반개혁적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개혁교회들이 더 이상 개혁교회가 아니라 반개혁 극우 교회들이 돼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바울이나,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을 신앙의 선조로 존경할 뿐이다. 또 그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개혁의 좋은 예로 참고할 뿐이다. 대신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야말로 우리 신앙의 근거이자 회복의 기점이다. 예수가 우리 시대 패러다임이다. 예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에게 요구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올해도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삶과 가르침을 삶속에서 실천하는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사순절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철저히 성찰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머리에 재를 바르고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외치며 진심으로 참회하는 시기이다. 나라는 존재가 곧‘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창3:19) 유한한 피조물임을 아는 시기이다. 사순절은 철저히 예수의 낮아짐과 겸손을 실천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처럼 나의 거짓 자아가 완전히 죽어지고 참 자아를 회복하는 시기이다. 사순절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시기이다. 예수님이 세상 모든 만물들에게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내 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잠시 맡겨 주신 것으로 생각하면서 아낌없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나누는 시기이다. 그럼으로써 사순절은 영적으로 좀 더 온전히 성장하는 시기이다. 온갖 탐욕과 위선과 이기주의를 넘어서 정의와 평화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를 온전히 바라보는 시기이다. 이 거룩한 시기는 무엇보다도 예수를 우리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시는 시기이다. 그럴 때 나 자신도 교회도 사회도 변화의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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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ler 2021-03-12 11:34:26
세상을 이길려 들지말고 세상을 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