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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기간에 지나는 영성의 오솔길
사순절 기간에 지나는 영성의 오솔길
  • 이정순 교수
  • 승인 2019.03.08 2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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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그의 삶을 실천하는 사순절 기간이 시작되었다. 요즈음 들어 한국교회도 사순절 40일 특별기간을 많이 지키고 있는 편이다. 그만큼 절기력을 따르는 교회들이 많이 늘었다는 증거이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이 기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만을 유독 강조하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이 기간만 되면 교회마다 사순절 40일 새벽 기도회나 특별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리곤 한다. 새벽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이야 잘못된 것이 없지만, 사순절의 의미를 여기에만 제한하는 것은 문제이다. 사순절은 교회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의 실천이 더 강조되는 기간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필요한 것 같다.

미국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하여 많은 교회들이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되는 사순절기를 중요하게 지키고 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 되면 곳곳에서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한 사람들을 보곤 한다. 재의 수요일 예배에 참석해 보면 지난해 종려주일에 썼던 마른 종려가지를 불에 태워 재를 만든 후 그것으로 신자들 이마에 십자가표를 만들어 주는 예식을 경험하게 된다. 목사나 신부는 사순절을 경건하게 시작하고자 하는 신앙인들을 설교단 앞으로 초대한 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1:15),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3:19)고 권고한다. 이 의식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마에 십자가의 형태로 재를 바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참회와 회개의 상징이다. 이제 부활절까지 지속되는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경건하고 특별하게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삶의 한 가운데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해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제 예수의 십자가를 이마에 붙인 만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인 것이다.

사순절(四旬節)40일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성 목요일과 성 금요일을 거친 후 부활주일 바로 직전까지의 40일을 의미한다. 물론 이 기간은 글자 그대로 40일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회개와 정화의 특별시기를 의미한다. 40일인가? ‘4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40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기 위해 거치는 정화의 준비의 기간을 상징한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참회와 속죄로써 자신을 정화할 때 ‘40’이라는 숫자가 종종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로 새로운 세상을 준비할 때 이 땅에 40일간 비가 내렸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40년간 광야를 헤맸으며,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단식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에게 40은 특별한 숫자이다. 특히 주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축하하기 위해서는 40일간의 참회와 정화와 겸손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

사순절 기간은 무엇보다도 영적 성장의 길이다. 영성이 더욱더 깊어지는 기간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기간이다. 흔히들 영성하면 성령충만을 생각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풍토이다. 통성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 영성의 전부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 같이 새벽기도에 나가 성령의 충만함을 달라고 기도하곤 한다. 또 각종 부흥회에 참석하여 울부짖곤 한다. 그러다 또 허전해지면 다시 이런 식의 부흥회를 찾곤 한다. 이런 식의 성령충만 역시 중요한 영성의 길이지만, 늘 반복되는 갈급함만을 재촉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참된 영적 성장은 힘들게 될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묵상과 기도 및 내적 성찰,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의 신앙적 실천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순간적인 뜨거움을 추구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생활 속에서 겪는 각종 스트레스와 한을 일시적으로 푸는 심리적인 해소감을 느낄 수야 있겠지만 참된 영적 성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내 안을 풍성하게 채워달라는 기도뿐만 아니라 내면 깊숙이 들어가 온갖 세상 때로 가득 찬 나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기도도 필요하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2:7)고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셨다. 이런 예수님을 본 받아 비움의 기도를 실천해야 될 때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영성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의 목회현장에는 각종 은사체험을 강조하는 성령운동이 만연했다. 또 바울 자신이 각종 신비체험을 한 자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인 예수님은 어떠한가? 예수님은 신비체험만을 유독 강조한 적이 없다. 예수님 자신도 신비 체험을 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변모사건(17:1-9, 9:28-36)이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변모사건을 기념하여 변모주일을 지킨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한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곳에 나타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하늘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소리가지 들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을 직접 체험한 신비로운 사건이다. 함께 했던 제자들은 그곳에 초막을 짓고 신비로운 상태에 계속 머물고자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비체험으로 산위에 머물기보다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길을 힘차게 갔다. 다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자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다. 그의 신비체험은 하나님나라운동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었다. 그의 영성은 하나님나라를 제대로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한 힘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면서 철저히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며 사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혼자만 신비스러운 체험이나 능력을 소유하고 즐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영성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무릇 모든 종교마다 나름대로의 신비체험이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특별한 현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어떤 단계의 정신적 육체적 수행에 이르면 신비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를 잇디’(iddhi)라고 부른다. 요가나 명상 수행을 집중적으로 오래 동안 한 사람은 이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 잇디는 참된 깨달음에 이르는 한 단계에 불과하지, 깨달음 자체와는 무관하다. 이제 막 구도의 길에 이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수행을 걸쳐 경험할 수 있는 초보적인 단계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해 특히 이런 잇디를 추구하는 경향이 심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하고, 꿈을 해몽하고, 예언기도를 하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고 신기하므로 이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영성의 길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지만 영성 그 자체는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모든 것들은 영적인 유아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영성의 길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의 인생여정처럼, 영성의 길에는 청소년기와 장년기와 노년기에 이르는 먼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노력이다. 예수님이 바로 대표적인 모델이다. 사순절 기간은 예수님의 영성을 본받는 기간이다. 예수님은 곧 닥칠 수난에 앞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구하며 밤을 지새운 것처럼 영성의 밤을 지나는 기간이다. 이 영성의 밤을 잘 지나면 또 다른 차원의 신앙에 들어선다.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활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중세의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요한(St. John of the Cross, 1542-1591)에 따르면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기까지 우리 영혼이 거쳐야 하는 세 가지 밤이 있다. 왜 밤을 지나야 하는가? 그것은 영적 성장을 위해 우리 영이 밤의 어둠 속에서처럼 고통스런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밤은 단절, 곧 탈출을 의미한다. 영성은 단절에서 비롯된다. 영성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기존의 것들과의 단절 할 때 시작된다. 곧 이제까지 품고 있던 세상적 소유물에 대한 욕망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이끌리어, 그에 대한 사랑에 불붙어 어두운 밤에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과 단절은 인간의 감각에게는 마치 밤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단절은 하나님의 해방활동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손을 펴셔서 히브리 노예들을 에집트의 억압에서 이끌어내셔서 대탈출을 시작하게 한 것과 같다. 이 탈출은 곧 투쟁과 전쟁을 의미한다. 칠흙 같은 어두움을 고통스럽게 지나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지나가게 하는 힘을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이 영혼의 첫 번째 밤을 지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밤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해 떠나는 신앙의 여정이다. 믿음은 하나의 여정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길을 떠나듯이 말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곧 믿음의 여정이다. 아니 믿음이 바로 길이다. 이 길은 이성적인 자에게는 어두운 밤과 같다. 이 밤은 첫 번째 밤보다 더 훨씬 깊고 어둡다. 하지만 이제 신앙을 길잡이 삼아 더 든든하게 확실하게 이 밤을 지나갈 수 있다. 어둠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제 믿음이라는 지팡이를 들고 더욱 확고하게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길은 또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영성의 길에서 뒤로 후퇴할 수도 있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성은 노력과 훈련이 없이는 성장하지 않는다. 광야에서 방황한 히브리인들처럼 이 길을 가는 자들은 또한 자신의 광야에서 철저한 고독에 처하곤 한다. 이 고독은 이기적으로 자신에게로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 이 막막한 광야, 지극히 깊고 아득한 광야에는 흔적을 남긴 길이란 자취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영성의 길에는 로드맵이 없다. 영성의 길이란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지속적이고 창조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개개인이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 안에서 찾고 만들어가는 길인 것이다.

세 번째 밤은 새벽이 되기 전의 상태, 곧 이제 새 날이 시작되어 빛이 막 떠오르기 시작하는 때를 뜻한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낮의 찬란한 빛, 곧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루게 된다. 모든 영성의 길은 바로 이 단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전 단계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밤에서와 같이 보이지 않지만 이제 영혼의 세 번째 밤을 지나면서 떠오르는 햇빛처럼 밝히 드러나신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체험하게 되며, 영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요한은 이렇게 고백한다. “아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사랑스런 밤이여! 아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연합시킨 밤이여, 사랑받는 자를 그 분의 사랑으로 변화시킨 밤이여.”

십자가의 성요한이 말하는 영혼의 세 밤은 하나의 비유이다. 자신의 영적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영성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영혼의 세 밤은 신앙인이 반복적으로 체험해야 될 다양한 영성의 단계들을 의미한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영성은 계속 걸어야할 길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좁은 오솔길과도 같다. 하나님의 주도로 시작되는 이 영성의 오솔길을 가기 위해 끊임없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또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영성훈련이 갖는 의미이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는 이 계절에 우리는 영혼의 어떤 밤을 지나고 있는가?

이정순 교수(목원대학교 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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