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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과 사회적 책임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과 사회적 책임
  • 이정순 교수
  • 승인 2019.03.3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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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과 사회적 책임

이정순 교수(목원대학교 신학대학)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이 되면 미국 보스턴 지역에서는 “굶주리는 자들을 위한 걷기대회”(Walk for Hunger)가 성황리에 열리곤 한다.

지난해 열렸던 “굶주리는 자들을 위한 걷기대회”(Walk for Hunger)./(주최측 홈페이지 화면 캡쳐)
지난해 열렸던 “굶주리는 자들을 위한 걷기대회”(Walk for Hunger)./(주최측 홈페이지 화면 캡쳐)

이 행사는 보스턴 시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큰 행사이다. 2006년도 미연방보고서에 의하면 매사추세츠주에서 약 50만명의 사람들이 지속적이고 적절한 음식을 공급받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다섯 명 중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미국의 현실을 가장 잘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이 걷기대회 행사는 “Project Bread"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리곤 한다. 언젠가 이 지역 신문을 보니 약 40,000명의 사람들이 참여해서 300만불을 모금했다고 한다. 모금된 돈으로 수백 개의 무료급식소를 돕는다고 한다. 이 지구촌 곳곳에는 여전히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 행사를 통해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다. 바로 이 대회는 미국 최초로 가톨릭 사제회를 결성한 아이작 헤커(Issac Hecker) 신부에 의해 매우 신앙적인 동기에 의해 이 행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기에,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Project Bread", 미국 최초 카톨릭 사제회 결성한 아이작 해커가 시작

1837년 헤커 집안 형제들은 뉴욕에 불어 닥친 경제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에 충격을 받고, 그들에게 빵을 만들어 나누어 주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때 막내였던 아이작 헤커는 18세였다. 아이작은 이 자선운동으로 많은 것을 경험했고, 이 일은 그의 평생사업으로 이어졌다. 아이작은 1843년 보스턴 남부의 웨스트 락스베리에 있었던 ‘브룩 팜’에 들어갔다. 이 농장은 데이빗 쏘로우와 왈도 에머슨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였다. 아이작은 이곳에서 “영적으로 성숙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삶의 길”을 실현해 보려고 노력한다. 아이작 헤커는 이 농장에서 빵 만드는 기술자로 공동체를 섬겼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진실된 추구자”(Earnest the Seeker) 라고 불렀다. 아이작 헤커는 1844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때 그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유럽을 도보로 걷기로 결심한다. 쏘로우에게 같이 동참하기를 간청했으나 쏘로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거부했다. 비록 유럽 도보 걷기운동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벨기에로 가서 신학공부를 하고 신부가 되어 미국에 돌아온다. 그 후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유형의 가톨릭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특히 평생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교회를 통하여 구현하려고 애썼다. 이를 “뉴잉글랜드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용감한 꿈”이라고 그는 주저없이 말하곤 했는데, 이 꿈은 바로 일생 동안 굶주리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아이작 헤커의 노력은 결코 허사가 아니었다. 1세기가 지난 다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아이작 헤커의 정신을 되살리는 운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이들은 1969년 처음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걷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후로 계속된 걷기 운동으로 1974년 “Project Bread"라는 기구가 탄생하여, 굶주린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운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매년마다 보스턴 거리에서 실시되는 걷기대회의 기원을 소개하면서 필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영성과 사회적 책임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아이작 헤커가 추구했던 사회 운동은 철저히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대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참된 영성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요즈음 많이 듣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영성’(spirituality)이다. 원래 이 용어는 가톨릭 전통에서 나온 단어이다. 특히 17세기 프랑스 가톨릭교회에서 영성에 관한 많은 저작들이 쏟아져 나옴으로 ‘영성’, ‘영성생활’, ‘영성신학’등의 용어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영성이라는 단어보다는 ‘성령이 충만한 삶’ 또는 ‘성령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말을 주로 써왔다. 가장 많이 드는 성서적 예는 고린도전서 2:14-15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인간과 자연인을 비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영적인 인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인간, 성령 충만한 인간에서 영성이라는 단어가 발전되어 나왔다.

오늘날 영성이라는 단어는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는 영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 스칼라 프레스에서 25권 시리즈로 발행되고 있는 ‘세계 영성’이라는 주제의 책이다. 이 책들은 세계 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 영성들을 각권마다 주제로 다루고 있다. 어떤 책은 불교의 영성에 관해, 또 어떤 책은 힌두교의 영성에 관해, 또 어떤 책은 유교의 영성에 관해 다루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 영성은 3권에 걸쳐 다루고 있을 정도로 그 연구 분야와 전통이 가장 광범위하다. 미국 종교학자들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는 전통적인 제도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줄어드는 반면, 새로운 종교 영성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싫증이 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또 한편으로 이제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대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가서 6장 6절~8절, 그리스도교 영성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성구

영성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곳곳에서 제시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구약성서 미가서 6:6-8야말로 그리스도교 영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고 생각한다. 본문의 주인공 미가 예언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25마일 떨어진 작은 농촌 출신의 청년이다. 그가 활동하던 B.C. 735-701년 당시 이스라엘은 국제적으로 신흥 강대국인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또 국내적으로는 많은 불의가 자행되고 있었다. 권력을 장악한 도시인들이 농민들을 속이고 수탈했고, 그들의 토지와 농작물마저 빼앗았다. 결과적으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한 자로 전락하는 그러한 현실이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갖은 불의가 저질러지곤 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미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외친다. 본문 6장 5절에 보면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노예로 고생하던 에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과 은혜를 이스라엘이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채 갖은 불의와 악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6장 6절에서 8절까지를 보면 먼저 예언자 미가는 사회적인 실천이 결여된 예배행위를 비판한다. “높이 계시는 하나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아무리 정성스런 예배와 제물도 사회적 실천이 결여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바로 8절의 내용이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동행하라.”

미가가 외쳤던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의 성숙한 영성, 균형잡힌 영성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이다. 영성에 대한 수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빠지면 다른 방식의 종교 영성은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존재를 생활 속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출발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내 마음에,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길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길이다.

둘째로,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 즉 자비(mercy)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삶이다. 어떤 번역에는 “한결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사람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따라서 비참한 곤경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자비와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서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신약성서 요한일서를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까지 얘기한다. 따라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만 하나님을 비로소 제대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이다”(요일 4:12). 나 혼자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 나 혼자만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아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자비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올바른 그리스도교의 영성이다.

셋째로, 단순히 이웃에 대한 자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정의의 실천에까지 나아가는 삶이다. 언젠가 어떤 목사님이 “정의와 자선의 차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다.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정의와 자선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자선은 내가 어떤 사람보다 좀 우월하다는 의식이 작용하는 상태이다. 내가 좀 형편이 더 낳고 더 좋아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의는 다른 사람들을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구체적으로 그들과 삶을 함께하는 좀 더 적극적인 차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에는 많이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정의의 문제를 들먹이면, 마치 신앙인과 거리가 먼 것인 양 잘못 생각한다. 정의야말로 이웃사랑이나 자선을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에서 실천하는 길이다. 정의야말로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토록 간절히 외쳤던 중심 메시지였다. 오늘날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선이란 불가능함을 우리는 너무도 뼈저리게 느낀다. 그것은 사회구조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선을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보다 정의로워지도록 사회구조적인 측면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영성은 한 단계 더 높아질 수 있다.

헨리 나웬,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영성의 본질 설명

오늘날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영성과 사회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사회적인 영성이 서로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20세기 영성신학의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헨리 나웬은 그의 역작인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안에서는 신비주의적 방법과 혁명적 방법이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 험적 초월방식의 양면이라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 .신비주의와 혁명주의는 급격한 변화 를 일으키려는 하나의 시도가 지닌 두 가지 측면이다. 신비주의자는 사회비평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성찰을 통해 그는 병든 사회의 뿌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 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혁명주의자는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상태와 직면할 수밖에 없 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이 자신의 두려움 및 거짓된 야망과 도 싸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과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별개의 과제가 아니고 십자가의 기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명백히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지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의 모습은 가지가지이다. 많은 이들이 성령을 뜨겁게 체험하고 각종 신비적인 은사를 받았다고 간증한다. 한국처럼 기도 잘하고 이른바 영적으로 뜨거운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현상들이 단지 개인적인 영성에만 국한된다면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쉽게 영적 자기도취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성숙한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사회적 실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미가서 6장 8절을 통해, 나타난 영성의 정의, 즉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고, 자비를 베풀기를 좋아하며,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영성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할 때이다.

영성적인 삶을 가장 먼저 실천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4:14-21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앞으로 자기가 감당해야 될 일들을 구체적으로 밝히시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이 단락을 흔히 예수님의 메시아 취임사라고 부른다. 먼저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나라운동을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을 충만히 받은 사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16절 이하를 보면 성령으로 충만한 그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서 두루마리 성경책을 들고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을 읽으셨다. 이 말씀은 예언자 이사야가 장차 태어날 메시아와 그 메시아가 짊어질 사명에 관해 예언한 내용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다. 누가복음 4:18-19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사명을 소개하고 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하셨고, 이제 이런 일을 하겠다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렸다. 이 복음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영성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언자 미가가 선포했던 말씀의 구체적인 실현이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영성은 역사와 사회 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삶이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영성에서는 영과 육이 분리되지 않았고, 개인과 공동체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며,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다. 이 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다. 그저 나 혼자서 은혜를 체험하고 마는 삶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 역시 너무도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교회는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도와주며 좀 더 세상이 밝아지도록 사회 구석구석을 찾아가 따뜻한 사랑을 베풀며 일하는 곳이다. 교회가 이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다른 사교집단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영성, 개인과 공동체 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실현

사순절을 지나면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이 영성으로 보다 풍부해지고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요 토대이다. 그분으로부터 힘을 얻고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비로, 사랑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사회와 역사 속에서 정의의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숙한 영성은 사회적 실천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이 성숙해 질수록 사회에 대한 관심과 실천도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바로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다. 이 거룩한 절기에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불꽃이 우리들 각자의 가슴 속에서 새롭게 타오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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